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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년 대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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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년 대홍수 당시 서울 지역의 피해를 기록한 《경성부수재도京城府水災圖

을축년 대홍수(乙丑年 大洪水) 또는 대홍수는 1925년 일제강점기 7월 7일부터 9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조선을 덮친 홍수를 말한다. 홍수의 피해 규모 및 영향 범위가 상당하여 '20세기 한반도 최악의 홍수'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925년 7월 6일부터 15일간 장마를 통해 황해도 이남 한반도에 내린 비가 엄청 났고, 이로 인해 약 두 달 동안 한강, 섬진강, 영산강, 낙동강, 만경강 등 한반도 주요 강이 모두 범람하여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실제 이 홍수로 인해 잠실을 비롯한 한강의 유로가 변경되기도 하였고, 홍수 이후 풍납토성암사동 선사주거지 등 서울 동부 일대의 문화재가 드러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는 대홍수 이후 재해 기금을 제도화하는 한편 한강을 비롯한 주요 강에 제방을 쌓아 재해에 대비했다.

홍수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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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7월 7일 대만 부근에서 태풍(2559)이 생성되어 11일과 12일에 한국 중부를 지나갔다. 이로 인해 한강금강, 낙동강, 만경강 등의 한반도 중·남부 지역의 강들이 범람하였다. 황해도 이남 지역에 300~500mm의 호우가 내려 한강은 구룡산에서 10.57m의 수위를 나타내었고, 한강, 금강, 만경강, 낙동강 등이 범람하였다.[1]

1차 홍수의 물이 채 빠져나가기도 전인 7월 14일, 타이완 부근에 다시 태풍(2560)이 생성되어 중부 지방을 지나갔는데 7월 15일부터 7월 18일까지 4일 동안 650mm 이상의 높은 강우량을 보였다. 연이은 홍수로 인해 한강의 수위는 최대를 기록했고, 제방이 무너지고 범람하여 용산 일대가 물에 잠겼으며 숭례문 앞까지 물이 차올랐다. 서울 시내의 교통과 통신 또한 마비되었다.

1925년 7월 17 ~ 18일 홍수 상황[2](pp. 37-38)
날짜 시간 최고수위

(구 용산 기준)

홍수 상황
17일 15시 10.55 m 뚝섬 장안평 방수제방 침수
18시 11.00 m 구용산 발전소 보일러 1분구 침수로 발전 중지. 금강산 송전만으로 유지.
19시 30분 11.40 m 신용산 제방 경정 부근에서 물이 넘어옴.

구 경의선 철교 제방 붕괴 신용산 범람 시작

21시 15분 11.50 m 뚝섬수원지 제방 붕괴
22시 30분 11.65 m 양동수리조합 제방 붕괴
23시 11.65 m 영등포 방수제방 붕괴
18일 00시 11.65 m 노량진 수도 바깥 제방에 물이 넘침.

가스 제조소 침수로 공급 중지됨.

00시 40분 11.55 m 송전선 고장으로 금강산 전기 송전 중단. 전등 꺼짐.
02시 30분 11.70 m 용산전화국 침수, 용산 방면 전화 불통
03시 30분 12.00 m 양천수리조합 제방 붕괴
04시 12.05 m 구용산 제방 붕괴
04시 22분 12.10 m 노량진 수원지 제방 정상 1척 남기고 붕괴
05시 12.20 m 인도교와 철도교 중간의 둑 파괴.

부평 수리조합 제방 붕괴

18시 12.20 m 김포농장 제방 범람

당시 익사자만 400여 명에 1만 2천여 호의 가옥이 유실되었다. 전곶교도 이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홍수로 여러 가지 유적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는데 백제의 풍납토성암사동 선사주거지가 이때 발견되었다. 18일 한강은 뚝섬에서 13.59m, 한강대교에서 11.66m 그리고 구룡산에서 12.47m의 수위를 나타냈다. 당시 용산의 철도청 관사는 1층 천장까지 물이 찼고, 용산역의 열차도 물에 잠겼다. 또한 뚝섬에 샛강이 생겨 신천(新川)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지금은 자취를 감춘 피수대(避水臺)의 느티나무 윗가지까지 물이 찼다.[1] 가장 피해가 심했던 곳은 제방이 설치되지 않았던 동부이촌동 · 뚝섬 · 송파 · 잠실리 · 신천리 · 풍납리 등이었다.

낙동강의 피해도 막심했다. 대저도는 전멸하다싶이 했고, 200구의 시체가 섬 아래에서 발견되었다.[3] 12일에 밀양김제에서 제방이 무너져 2,000명이 행방불명되었고, 15일에는 창원에서 제방이 무너져 6,000명이 고립 또는 실종되었다.[4]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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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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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7월 대홍수로 풍납토성서울 암사동 유적이 드러나는 한편, 이건창 영세불망비는 이 홍수로 유실되고 살곶이다리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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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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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을축년홍수(乙丑年洪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0년 11월 10일에 확인함. 
  2. 朝鮮總督府 內務局 土木課 (大正15(1926)). 《朝鮮の 洪水. 大正14年》. 京城: 佐藤印刷所. 
  3. “과연이천이백호전멸상태(果然二千二百戶全滅狀態) 시체이백발견(屍體二百發見)”. 조선일보. 19250715. 2020년 11월 10일에 확인함. 
  4. “을축년(1925년) 대홍수의 평가 및 홍수기록 복원 연구”.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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